사진방/놀라운 세상

피로 물든 이민대, 도너대

천리향(민정) 2012. 6. 20. 16:23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본문의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심약한 분들이나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 등은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조사하여 올리는 글들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닌데 하나를 조사하니 그와 관련된 다른 글들이 자꾸 눈에 띄어서 연속적으로 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cannibalism에 대한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게 아닌가 고민할 정도.


네바다주의 시에라 산맥을 넘는 도너 패스(Donner Pass)라는 산길이 있다. 도너 레이크(Donner Lake) 호수 주변으로 난 길로

황금광시대(gold rush) 많은 이들이 동부에서 꿈을 좇아 서부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해 지나간 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도너 패스와 도너 레이크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에는 참혹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도너 패스, 1870년대


1월 11일, 다쓰러져가는 몰골로 산을 넘어 새크러먼트의 존슨 목장에 구조요청을 하였고, 곧 구조대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한겨울의 산을 넘어 조난된 사람들을 구해올 수 있다는 보장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다.

2월 16일, 천신만고 끝에 트릭키 호수 근처의 조난자 캠프에 구조대는 도착했다.

캠프지에서는 아직 식인 행위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추위와 배고픔으로 체력이 다한 그들 가운데 다수의 사망자가 있었고,

 그들을 묻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곧곧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더욱이 불행한 일은 구조대 역시 식량이 넉넉치 않았고,

구조대 자신들도 조난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산을 넘을 수 있는 이들만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하여 24명이 선발되어, 목장으로 돌아온다. 물론 조난 캠프에 남겨놓은 식량은 없었다.

 


1972년 비행기 사고로 안데스 산맥에 조난당한 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72일간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고 버텨, 29명이 죽고 16명이 구출된다.


3월 1일, 두번째 구조대가 도달했다. 무서워하던 일은 벌어져 있었다.

식량을 남겨놓고 가지 못했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고, 조난 캠프 주변에는 '골격 표본'이 널려져 있었다.

그들은 죽은 이들을 먹고 살아남은 것이였다. 두번째 구조대 역시 식량은 넉넉치 않았고 이번에는 12명의 사람들이 구조대와 함께 산을 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조대 역시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목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식량이 바닥나게 된다.

 그때 7세의 메리 도너"또 죽은 사람을 먹지 않으면..."이라고 순진하게 말했다.

1시간도 되지 않아 그레브스 부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국 2차 구조대는 11명을 구조해 내었다.

한편 남겨진 조난 캠프에서는 조지 도너 가족을 중심으로 수십명의 사람이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조지 도너는 동상에 걸려 다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스 케스바그가 리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당시 루이스 케스바그는 반쯤 미쳐있는 상태였다. 루이스는 4세의 조지 포스터를 자신의 옆에 두고 재웠다.

그런데 다음날 조지 포스터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모두들 살해를 의심했으나 루이스는 자연사라고 주장하며,

시체를 나무에 걸어놓고 나이프를 꺼내며 말했다. "자, 빨리 먹자"

3월 13일, 3번째 구조대가 도착한다. 이번에는 대부분의 사람을 데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지 도너의 부인은 중태의 남편을 두고 갈 수는 없다는 이유로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그곳에 남기로 했다.

구조대는 부인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으므로 루이스 케스바그를 남겨두고 가기로 했다.

사실 그를 두고 가는게 걱정이었지만 이번에는 식량이 충분했으므로 별다른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4월 17일, 마지막 구조대가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 생존자는 케스바그 혼자였다.

구조대는 그에게 "도너 부인은?"이라고 묻자, "거기에 있다"라며 커다란 냄비를 가리켰다.

두 개의 큰 냄에서는 '무언가'를 넣은 스프가 끓고 있었으며, 프라이팬에도 버터를 바른 고기 등이 구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가리키며 케스바그는 태연하게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그녀가 가장 맛있었다"라며 말했다.

구조대가 황당해서 오두막을 조사해보니 이전에 남겨둔 식량이 충분히 남겨진 상태였다.

 그것을 지적하자, 케스바그는 "아무래도 소고기 육포는 너무 딱딱한데다 별 맛이 없다.

사람의 간 등이 훨씬 맛있다"라고 말했다. 기가 막힌 구조대는 그를 고문했지만 도너 부인 살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루이스 케스바그는 도너 파티의 마지막 생존자로 귀환했으며, 가끔 술에 취하면 "그녀는 정말 부드러운 여자였다"며 말했다고 한다.

1850년대 초, 케스바그는 스테이크 하우스를 개점하는데 선전문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최상의 부드러운 육질의 고기 밖에 취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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